소설 '서유기'도 작가인 오승은의 의도인지, 아니면 이 책을 접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시점이 달라지기 때문인지 같은 장면이라도 처음 읽었을 때와 다음 재탕했을 때의 감상이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뚜렷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서유기'의 주역들이 과거 저지른 잘못과 그 잘못을 처벌하는 부분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오공이나 팔계는 모를까 오정이나 용마는 과한 처벌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인데 지금에 와서 생각한다면 두 사형에 비하면 얌전한 편인 오정이나 용마가 저지른 잘못 또한 가볍게 넘어갈 부분이 아니었던 것.
소설에서 천봉원수(팔계)는 엄연히 자신보다 높은 직급에 해당하는 월궁의 주인 항아 선녀에게 들러붙어 성관계를 강요했다고 나옵니다. 팔계는 자신보다 고위직인 여성에게 술기운을 빌미로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했고, 그 죄로 붙잡힌 자리에서 반성 없이 큰 소리를 치는 바람에 그 죗값으로 철퇴로 2천 대 맞고 추방당한 뒤 돼지 꼴로 태어났는데 그 한 짓을 생각해 보면 현대 시점으로 보아도 심한 처사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반면 권렴대장(오정)은 중요한 반도 대회에서 귀한 유리잔을 깨뜨려서, 옥룡삼태자(용마)는 실수로 불을 내어 아버지의 보물인 야명주를 불태우는 바람에 각각 직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는 처벌을 받게 되는데요.
보물 유리잔과 야명주라는 물건은 현재의 우리에게 와닿지는 않은 느낌이지만 일단 권렴대장이 깨뜨린 유리잔은 천궁의 보물이고, 옥룡삼태자가 불태운 야명주는 서해 용궁의 보물입니다. 현재 우리가 문화재라고 여기는 물건들과 상당히 귀한 가치를 가지는 보물들의 원래 쓰임새를 생각해 본다면 저 유리잔과 야명주는 각각 한 나라의 문화재로 치환할 수 있는 것들로 권렴대장과 옥룡삼태자가 저지른 짓도 가볍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셋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이는 다름 아닌 주인공인 손오공으로 손오공이 지은 죄를 열거한다면 용궁에 들어가 반협박으로 여의금고봉을 비롯 귀한 보물을 갈취했고, 저승차사 둘을 죽인 뒤 저승의 공문서인 생사부를 훼손, 필마온 관직이 맘에 안 든다고 무단이탈한 데다 제천대성을 칭하면서 천궁에 반기를 들고, 천궁의 귀한 보물인 반도 복숭아와 도솔궁의 선단 및 반도대회의 음식을 훔쳐 먹고 천계인들을 위협하는 등 여러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텍스트로만 열거해도 오공이 500년 오행산에서 갇힌 게 결코 무거운 처벌은 아니었단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가장 황당하다 싶을 수 있는 처벌은 삼장법사의 전생인 금선자가 부처님의 설법 도중 살짝 졸아서 쌀 한 톨을 밟은 죄로 인간으로 환생하게 된 것인데, 삼장법사가 귀족 집안에 태어났다고 해도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고난이란 고난은 다 겪기 때문에 작중에서 가장 불합리한 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설 상에선 이 부분을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비슷한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작중에서 팔계 같은 인간이 같은 행동을 해도 큰 죄가 되지 않지만 부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라는 귀한 신분의 인물은 그 행동거지에 더 조심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설법 도중 졸아서 쌀 한 톨을 밟는 것이라도 큰 문제가 된다는 듯. 그래도 이 부분은 삼장이 금선자의 환생이라는 설정에 개연성을 주려고 좀 억지로 끼어넣은 감이 없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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