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가운데 고전소설 '서유기'의 소재를 가지고 재창작한 작품들이 제법 있는 거 같습니다. '서유기'의 옛 원전 자료 중 하나가 일본에서 발견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 '삼국지연의'가 사랑받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서유기'가 사랑을 받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모험물이라는 원전의 특성상 이것을 각색하거나 재창조하는데 유리한 측면이 있으니 애니메이션과 만화 산업이 발달한 일본에서 이 좋은 소재를 그냥 놔둘 리도 없을 테고요.
당장 서유기를 모티브로 한 일본 만화하면 제가 떠올릴 수 있는 작품들은 그 유명한 '드래곤볼'과 '최유기' 이 두 작품입니다. '드래곤볼'이 어느 정도 모티브만 따왔을 뿐 본편의 전개에서 소설 '서유기'와는 매우 판이한 양상을 가진다면 그래도 '최유기' 쪽은 배경이나 전개 부분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주인공들의 모험이 중심이라는 점이나 주요 캐릭터 특성에서 어느 정도 소설 원작의 성격을 유지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삼장법사
만화 '최유기'의 주인공인 삼장법사는 원작 삼장법사의 성격 중 유약하고 눈물 많은 단점을 삭제한 뒤 오히려 원작 손오공의 성격을 전이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작의 손오공은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요괴나 도적들을 가차 없이 때려잡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이나 스승인 삼장법사로부터 무자비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인물이지만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이다 보니 손오공의 행동이나 대사에서 소설의 주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캐릭터적 특성이 만화 '최유기'에선 현장 삼장에게 옮겨졌다는 사실.
물론 '최유기'에서 삼장이 그런 성격이 되기까지 진심 여러 우여곡절과 방황으로 점철된 과거가 존재하고 본편에서 그것을 잘 묘사하고 있지요. '최유기'의 비중적인 측면이나 만화의 구도로 볼 때 원작 '서유기'와는 다르게 이야기의 중심 축이 삼장에게 좀 더 쏠려 있다는 것이 특이점.
2. 손오공
반면 '최유기'의 손오공은 원작에서 보이는 적에 대한 무자비함과 더불어 영리함 혹은 지성적인 측면은 많이 사라진 편입니다. 작중에서 막내 포지션에 식탐이 강한 성격을 타고났는데 원전 '서유기'에서 막내 포지션을 담당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삼장을 서천까지 태우고 다녀야 하는 백마 역할의 옥룡삼태자이며 식탐 속성이 강한 인물은 바로 돼지 요괴인 저팔계입니다. 즉, 옥룡삼태자의 막내 포지션과 저팔계의 대표적인 성격 중 하나가 '최유기'에선 손오공에게 전이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다만 '최유기'의 오공이 금고아에서 벗어날 경우 제어하기 어려운 요괴(제천대성)로 변한다는 점은 원작 '서유기'에서 종종 보이는 손오공의 제어되기 어려운 요괴 속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저팔계
'최유기'의 저팔계는 현장 삼장과 더불어 원작의 캐릭터와 또렷하게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원작 저팔계의 민폐적 성격, 음식과 여자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손오공에게 일방적으로 열폭하여 조잡한 계략을 세우거나 눈치가 없어 왕족 같은 귀빈을 대할 때도 무례한 언행을 저지르는 단점들은 전부 삭제되었는데 다름 아닌 '최유기'의 저팔계 캐릭터가 보이는 예의 바름은 원작 삼장법사의 성격에서, 차분한 면모와 결정적인 순간에 옳은 말을 하는 성격은 원작 사오정의 그것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최유기'의 손오공과 마찬가지로 요괴의 모습을 봉인으로 억누르거나 외양과 달리 상당히 강한 면모를 가졌다는 것은 원작 손오공의 속성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4. 사오정
'최유기'의 사오정은 붉은 머리라는 외양(만화 특유의 설정으로 요괴와 인간의 혼혈일 경우 발현되는 성질)은 원작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특이하게 원작 저팔계의 식탐 속성이 손오공에게 전이된 것처럼, 여색을 탐하는 속성과 어느 정도의 무례함은 사오정에게 전이되었다는 게 특징. 하지만 만화 속에서 사오정은 유달리 여성과 어린아이 같은 약자가 얽힌 일에서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런 부분은 원작의 사오정과 삼장법사가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자비로운 면모가 부각되는 점에서 이어진 것이라고 추측해봅니다. 다른 요괴 주인공인 손오공과 저팔계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요괴의 본성을 봉인으로 억누르는 것과는 달리 사오정은 그런 위협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또한 원작 사오정의 성격이 많이 유지된 편이라 보이고요.
'최유기' 역시 '서유기' 캐릭터들의 이름이나 설정은 가져오긴 했으되, 만화 본편의 설정과 전개는 작가의 의도와 취향에 따라 변경되어 원전과는 크게 달라지는 특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의 성격 역시 소설 속 그것과는 반대되는 속성을 보이기에, 그렇다면 만화는 작가(미네쿠라 카즈야)가 의도적으로 원작 소설 속 캐릭터들의 성격을 반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성격을 반전시킨 것이라기 보단 원래 주인공들이 가진 성격을 나누어서 이야기 전개에 불필요하다 싶은 부분은 없애고 그것들을 각각 다른 주역 캐릭터들에게 전이시킨 뒤 새로운 캐릭터로 재창조했다고 해석됩니다. 원작 '서유기'와는 방향성이나 주제는 다르지만 의외로 '서유기'의 성격이 많이 유지되는 작품이 '최유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사용한 이미지 출처 : https://saiyuki.fandom.com/wiki/Saiyu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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