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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서유기'에서 여성을 구제하는 방식과 그 성격 : 온교와 백화수 공주 사례

by 01사금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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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 '서유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환상적인 소재의 옛날이야기나 모험물이라는 편견과는 반대로 중국 고전 소설답게 곳곳에 등장인물의 잔인한 성격이나 사건 묘사가 들어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또 읽다 보면 다른 고전 소설들과는 반대로 그 잔인하고 섬뜩한 묘사가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미화하기 위한 재료가 아닌, 당시 시대의 척박함이나 사건의 끔찍함을 드러내는 요소 혹은 문제 행동이나 사건을 유발하기 위한 함정으로 주인공인 손오공마저도 요괴 시절의 난폭함을 제어하지 못해 그것이 스승이나 다른 일행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다수. 



또한 소설 속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는 사건들은 표면적으로는 옛날이야기에서 많이 보았음 직한 나쁜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거나 납치하거나 하는 이야기가 다수지만, 좀 더 파고들어가면 오승은으로 대표-추정되는 저자가 은근히 내부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있거나 그 목적을 위해 구성한 에피소드가 많다는 게 드러납니다. 



특히 다른 고전소설인 '삼국지연의'나 '수호전'과 달리 '서유기'는 여성 피해자들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한 묘사를 보이므로 앞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읽을 때 좀 덜 거북한 기분으로 접할 수 있기도 했습니다. 물론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서유기 소설(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서유기 백회본)은 명나라 말기에 완성되었다시피 한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앞서나갔다 하더라도 시대 특유의 한계에 갇혀 있는 부분도 보이긴 합니다.  


* 적당한 이미지 자료가 없어서 예전에 제가 그린 서유기 만화의 이미지를 참고로 사용했습니다. 

 
서유기 백회본의 에피소드 중에서 현실의 성범죄를 은유했다고 볼 수 있는 사례는 바로 삼장법사 출생담의 은온교 이야기와 보상국 황포요괴 에피소드의 백화수 공주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둘은 모두 납치 결혼의 피해자라는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현재에도 인권 의식이 희박한 나라에서 여전히 여성들 상대로 납치를 한 뒤 강제 결혼하는 케이스가 적지 않은 것을 본다면 현대보다 인권의식이 전반적으로 낮았던 옛날에는 그런 경우가 더 많았고 그런 피해를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암울했을 것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삼장법사 출생담은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가공된 것이고 딱히 서유기의 모험 과정과 큰 연관이 없어 대다수의 서유기 관련 영상 매체에서는 생략되는 에피소드이고, 보상국 황포요괴 에피소드는 제가 본 서유기 드라마(2010 절강판 新서유기, 2011 장기중판 新서유기)에 한해서 그 잔인함이나 수위 문제 탓인지 상당히 각색이 이루어진 에피소드들이기도 해요. 
 

 

삼장법사 진강류의 기구한 출생담은 서유기 1권 후반부에 실려 있는 이야기로 소설 상에서 삼장법사의 친모인 온교는 남편 진광예와 부임지로 향하다 도적의 손에 걸려 진광예는 살해, 온교는 강제로 도적에게 끌려가 그의 아내로 살아야 하는 운명을 맞습니다. 온교는 아들인 삼장법사 진강류를 구하기 위해 혈서와 함께 갓 태어난 그를 강에 떠나보냈고 아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승려가 된 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돌아온다는 것이 주 내용으로, 이 에피소드의 눈여겨 볼 점으로는 도적 놈들을 법에 따라 처벌하고 삼장법사가 가족들을 모조리 구해내긴 했지만 이야기 말미에 '은소저-삼장의 친모-는 마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끝내 조용히 목숨을 끊고 말았다(문학과 지성사판 서유기 1권 p307)'라는 구절이 있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처음 이 구절을 접했을 때에는 복수도 끝나고 해방된 삼장의 친모를 굳이 자살시켜야 했는가 불만이 있었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본다면 반평생을 남편을 살해한 도적에게 성적 학대를 겪어야 했을 여성이 당장 거기서 해방된다고 해서 바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며 성범죄 피해자들의 트라우마가 크다는 것을 본다면 이런 결말도 무리도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저자가 어째서 온교의 마지막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지었는가는 당시 시대적 상황, 앞서 이야기했듯 성폭력과 납치 결혼을 감수해야 했던 여성에게 돌아왔을 사회적인 비난, 예를 들자면 '도망치지 않고 가해자랑 계속 살았던 것은 강제가 아니라 결국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는 왜곡된 인식에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피해자인 온교는 한 번도 그 상황을 원한 적 없고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입었는지를 묘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관점은 책 '조선의 선비, 귀신과 통하다'에서 처녀 귀신이 된 아랑이 원한을 풀 수 있던 것도 그녀가 겁탈당한 뒤 살해당했기 때문이며 만약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반항을 하지 않았거나 자살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을 거라는 설명과 일맥상통하는 경향이 있는데 말하자면 명나라 말기에 나온 소설 속에서 납치 결혼 피해자인 온교(혹은 그녀로 은유되는 성범죄 피해자)를 옹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부득이하게 그것을 선택한 것이며 결국 그 방법이 자살이라는 점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한 한계점일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보상국 황포요괴 에피소드의 피해자로 등장하는 백화수 공주는 온교의 상황보다 좀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입장에 처해 있는데, 보상국의 막내 공주이면서 황포요괴에게 강제로 납치당해 십여 년을 그의 아내로 살면서 아이까지 낳은 상황이고 심지어 황포요괴는 막판에 전생에 선녀였던 백화수 공주와 자신이 사랑했던 사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백화수 공주는 납치 결혼 피해자가 들었을 법한 사회적인 비난을 더 받기 쉬운 상황에 처해 있는 편이라 볼 수 있는데... 
 

 

하지만 작 중 묘사를 볼 때 이 백화수 공주와 전생에 사랑해서 부부로 살기로 했다는 주장도 가해자인 황포요괴의 일방적인 것이고 백화수 공주는 에피소드 내내 전생에 대한 기억은 커녕 황포요괴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거나 그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뿐으로, 삼장법사를 풀어주면서 부모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는 편지를 부탁하는 행동만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만약 소설 속의 전생 드립을 현실에서 사람들이 흔하게 언급하는 피해 여성의 과거 행실 드립과 연결할 수 있다면 엄청난 시사점이 될 만한 부분이라고 할까요.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에는 전생 드립 때문에 허탈했다가 오히려 나중에 소설을 다시 정독하고 난 뒤 이런 설정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해석이 들었습니다. 특히 백화수는 황포요괴 사이에서 아이까지 낳은 상황이고 전생 문제도 있어서 당시 시대라면 나왔을 법한 비난, 강제로 결혼했어도 '자식까지 낳았으면 혹은 과거에 염문이 있었으면 끝까지 그의 아내로 살아야 한다'는 비난을 받기 쉬운 상황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백화수 공주의 복잡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 서유기는 독특하게도 주인공인 손오공의 입을 빌어 유교 윤리의 불효 문제를 끌고 들어와 그녀가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 당위성을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사람들에게 낯설지만 소설이 나온 시대나 우리나라의 조선 시대에도 유교적인 윤리는 현실과 밀접하게 엮여 있어 당시 사람들에겐 함부로 건드려선 안되는 문제였고, 불효는 큰 죄악으로 분류되어 패륜 범죄에 대해선 상당히 강도 높은 처벌을 행했던 시절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백화수 공주가 불효죄를 짓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녀를 현재의 상황과 비난에서 빠져나갈 구실을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달리 보자면 당시 시대 상황을 보았을 때 백화수 공주와 같은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당시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유교 윤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죠. 
 

 

이 보상국 황포요괴 에피소드에서는 서유기에서도 유례없을 정도로 잔인한 장면인 요괴의 자식들을 공중에서 내던져 죽이는 묘사가 나오는데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상당히 섬뜩한 장면. 거기다 이것을 행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주인공인 손오공과 그 동생들이라는 점으로 그 자식들이 요괴라는 점을 감안해도 굉장히 끔찍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라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에는 결국 주인공 놈들도 그 본성은 요괴라는 점을 여실히 느낀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잔인한 속성 속에는 강제적으로 낳은 아이에 대해서 피해자에게 굳이 모성을 강요하지 않는 일면이 보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백화수 공주가 강제 결혼 뒤에 낳은 아이들에게 모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다뤄지지 않는 점 또한 소설의 한계로 볼 수 있기도 합니다만. 그런 점 때문인지 드라마 2011년 '장기중판 新서유기'에선 공주와 함께 아이들을 돌려보내는 결말로 마무리되기도 하더군요. 
 


 
* 포스트 원본 출처 : https://blog.naver.com/naninkan/221250913282

 

소설 <서유기>에서 여성을 구제하는 방식과 그 성격 : 온교와 백화수 공주 사례

고전 소설 <서유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환상적인 소재의 옛날이야기나 모험물이라는 편견과는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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