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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 삼국지의 영웅에서 의리와 부의 신이 되기까지』 감상문

by 01사금 2025.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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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영웅에서 의리와 부의 신이 되기까지』는 이미 옛적에 읽은 것이긴 하지만, 특이하게 『삼국지연의』나 정사 속 관우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관우의 신앙이 형성된 과정을 찾아가는 책이므로 나름 흥미로운 구석이 있기 때문에 리뷰를 해 보려 합니다. 책에 의하면 관제(관왕) 신앙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퍼져있다고 하는데 책 머리말에 의하면 관우는 개조(開祖) 또는 교조(敎祖)라고 할 수도 없으며 사람들의 관우의 충의를 본보기로 삼는 것을 종교라고 하기에는, 관우교를 직접적으로 전파한 인물도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관우에 대한 신앙은 널리 퍼져나가 크고 화려한 관제묘가 각지에 세워졌고, 마침내 아시아 제일의 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책에선 우리나라의 관제신앙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우리나라도 관제를 모시는 동묘가 존재하고 관우신앙의 흔적이 민간신앙에 남아있지요. [책 『한국의 관제신앙』 참조]

저자는 이마이즈미 준노스케로 일본에도 관제묘를 모시고 있고 그것 때문에 저자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긴 하겠지만 책에서 언급되는 관우 신앙의 실마리는 역시 본토 쪽에 쏠려 있습니다. 즉, 『삼국지』 정사의 기록, 관우가 거주했던 곳에 남아있는 전설과 야사, 연의에서 구현화된 관우의 모습, 중국 곳곳에 세워진 관우를 기리는 유적 등등을 찾아가면서 관우란 인물이 어떤 식으로 민중들에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고찰하며 총 9장의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장에서는 관우의 출생지와 그곳에 남겨진 관우의 흔적을 찾아갑니다. 관우란 인물이 사람들에게 워낙 사랑을 받다 보니 관우의 고향에서도 관우를 연구하는 향토학자들이 많은데요. 이들의 연구 덕에 정사에서 자세하게 나오지 않는 관우의 젊었을 적의 모습을 형상화할 수 있었습니다. 

책에 따르면 관우의 출생기록을 160년으로 보고 있는데, 연의나 정사에서 자세히 나와있지 않은 관우의 출생 연도를 알아낸 것은 전적으로 그 지역 연구자들의 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연도를 따른다면 관우는 유비보다 한살이 더 많은 셈인데, 그럼에도 그는 유비를  형님으로 따른 게 되며 여기서 유비란 인물의 그릇이 대단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유비의 그릇이나 매력에 대해서도 책에서 누누이 강조가 되지요. 또 여기서 장비는 관우보다 13살 어린것으로 추측되던데 이 나이대로라면 관우랑 장비가 괜히 사이가 좋은 게 아니더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 계산대로라면 장비는 여기서 추측한 관우의 장자 관평과도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은 셈이 돼요.

관우가 고향에서 망명한 이유는 정사에서 죄를 짓고 달아났다 정도로 기록된 반면 그 지역의 전설이나 연구 기록에 따르면 좀 더 복잡한 이유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관우의 도피에 관한 구전과 전설, 유비와 장비와의 만남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 어째서 관우가 다른 장수들보다 민중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합니다. 1장과 2장에 거쳐 설명되는 관우의 도피행각은 당시 후한시대의 혼란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관우의 출신이 하층민 혹은 농민일 것이라는 추측은 거의 기정사실로 여겨지는 셈인데 관우의 본 이름으로 알려진 '장생'은 농민들이 많이 쓰던 이름이라는 글을 본 적도 있어요. 일단 여타의 민중들과 다를 바 없는 신분이라는 점에서 관우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하나 형성된 셈이지요. 

거기에다 관우의 살인에 관해서 전해지는 숱한 이야기들은 구전마다 약간의 차이점은 있지만 대개 그 지방의 토호 혹은 거상이 힘없는 지방 사람을 착취하거나 혹은 힘으로 여성들을 겁탈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보다 못한 관우가 그들을 처단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이야기는 관우의 '의'와 관련된 일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협'과도 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3장에서부터 8장까지는 본격적인 관우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정사에 기록된 관우전은 짧은 내용이지만 관우와 접했던 많은 인물들 유비와 장비를 비롯하여, 여포, 조조, 장료, 제갈량, 노숙, 여몽, 육손 등 다른 인물들의 기록을 통해 관우의 모습을 겹쳐갑니다. 그 덕택에 짤막한 정사 속의 관우, 충의로운 연의 속의 관우와 다른 모습의 관우가 떠오르면서 동시에 연의에서는 묻혔던 몇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 또한 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재미난 것은 초선과 관우의 로맨스를 다룬 부분이었습니다. 책 자체는 정사의 기록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편이지만 종종 신빙성 없어 보이는 부분도 약간 존재하는데, 여포가 몽골 출신이라거나 관우가 여포의 처를 사랑했다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실제 관우전 주석에 의하면 관우가 좋아한 여자는 여포의 처가 아니라 여포 휘하의 '진의록'이란 인물의 처라고 전해지는데, 이 책 자체에서도 관우가 좋아한 여자가 여포의 처일 수도 있고, 진의록의 처일 수도 있다며 중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긴 합니다. 그렇다고 이 배송지의 주석 자체가 신빙성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은 있지만요. 하지만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간통하고, 여포의 처와 유비 일행이 안면이 있었고, 관우가 좋아한 여자가 따로 있었다는 짤막한 데다 따로 존재하는 기록을 통해서 초선이란 인물이 탄생하고 그 초선이 관우랑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는 점을 보면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참 무궁무진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연의에선 초선의 존재는 연환지계 이후로 등장이 없어지는데, 이는 『삼국지연의』의 저자인 나관중이 소재들을 취사선택할 때 불필요하게 여겨 빼버린 탓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관우와 관련된 인물 중 새롭게 평가될 수 있는 인물은 노숙이 있습니다. 노숙은 『삼국지연의』에서 첫 등장했을 때의 모습을 제외하면 후반에는 우유부단하며 속만 좋은 인물이 되어버립니다만, 친유비파에 가까운 노숙이란 인물이 동오에 존재하면서 유비군은 자신들의 상황을 추스르고 유지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형주에서의 유비 측과 손권측의 불필요한 분쟁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조조의 위만이 아니라 동오마저 매우 적대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오해받지만, 심리적으로 전쟁에 가깝더라도 실제로 관우는 위를 적대하고 오와 연대하라는 제갈량의 방침을 따른 측면이 크다고요. 

오와 촉이 적대를 한다면 득을 보는 것은 조조뿐이라는 것을 관우와 노숙 둘 다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손권측과 관우 측이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것이 목숨 건 전쟁으로 확대될 것은 아니었다는 게 확실합니다. 이것이 노숙의 공임에는 틀림없으며 저자가 추측하기에 겉으로는 서로 적대해야 했지만 관우와 노숙 간에 서로 인간적인 감정교류가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고요. 문제는 노숙의 이른 죽음으로 관우 측에 대한 손권측의 노선이 변해버린 겁니다. 이 점이 결과적으로 관우의 죽음을 불러오게 되지요.
관우의 죽음에 앞서 번성전 당시 관우의 모습은 화하를 뒤흔들 정도였다고 정사에도 기록되었는데, 이런 점을 보더라도 당시 관우군의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 언급되는 유적지 부근의 환경을 살펴보면, 관우가 어떻게 수공을 썼는지 짐작이 가능한데, 『삼국지』 시대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그 지역은 물이 범람하기 쉬운 구조라고 하더군요.

관우는 미묘하게 '물'과 얽히는 경우가 많은데, 관우가 출생한 지역도 염전을 짓는 곳이었고, 번성전도 수공을 통해 승리한 셈이니 후대 사람들이 관우를 용의 화신으로 생각할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이 찬란한 승리 끝에 결국 관우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관우의 죽음 이후 관우의 혼령이 여몽을 죽이고, 조조도 데려갔다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지어냈다고들 하는데,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것은 관우의 죽음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인 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미묘하게도 관우 신앙의 시초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고요. 아이러니하지만 관우가 살아남아 승리했더라면 위대한 장수로는 이름이 남을 수 있어도 '신'은 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마지막 장에서는 관우의 신앙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갔는지 짤막하게 고찰합니다. 책 설명에 의하면 초반 관우는 형주지방의 지역신 정도로 모셔졌으며 관우만이 아니라 유비나 장비 역시 같은 신급으로 받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우 혼자만이 대중적인 신으로 받들어지게 되는데 관우 신앙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수당시대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민적이면서 뛰어난 장수였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관우가 일반백성들에게 환영받은 데다 특별한 종교색이 없었기 때문에 불도교에도 무리 없이 섞여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의 관우는 아직은 민간신앙에서 친숙한 신 정도로 여겨졌는데 11세기 초 송대에 들어서면서 관우신앙이 국교화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당시 금과 적대관계였던 송나라 사람들에게 구원자로서 이미지로 민중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관우가 적합했기 때문이지요. 관우 신앙은 송대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후대에도 이어져 원대와 청대에도 크게 확산되는데 이는 이민족정권이었던 원과 청이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방도로 관우신앙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포용정책의 일환이었던 관우신앙은 더욱 확산되어서 호국신이면서 수호신, 충의의 신 그리고 재(財)신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관우의 고향인 산서성 부근이 소금을 취급하는 주요 상업지였고 그 지방의 상인(산서상인)들이 관우를 받들고 그들을 통해 관우 신앙이 각지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관우신앙의 흔적을 찾아가 보면 재미난 결론이 나오게 되는데, 관우 신앙의 근거로 정사 속의 관우의 이미지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민중 쪽의 관점이 더 두드러진다는 겁니다. 즉, 민중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출신이면서 당대의 누구보다 충의를 지키고, 활약을 한 관우에게서 자신들이 바라는 모습과 동시에 친숙함을 발견했던 것은 아닐는지요? 민중들은 관우를 통해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투사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투사를 가능케 한 관우의 삶은 두 번 말할 필요도 없겠고요. 『삼국지연의』의 저자인 나관중이 어째서 다른 인물들보다 관우에게 공을 들였는지도 책을 읽고 나면 충분히 짐작이 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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