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속의 삼국지』는 처음 『삼국지』의 야사나 전설 등을 통해 『삼국지연의』의 숨은 면모를 찾아가는 이야기인가 싶었습니다. 근데 제 예상과는 반대로 이 책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주요한 인물들을 저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비판하고 평하는 글이더군요. 1권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삼국지연의』의 주역인 조조와 유비, 제갈량, 방통, 주유, 노숙, 관우입니다. 인물에 대해 들어가기 앞서 저자는 중국인들의 역사관을 심도 있게 살펴보는데, 이 책의 특징이 인물론에 들어가면서 상당한 중국 고사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책의 서두에 들어가는 중국인들의 역사관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순환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시작도 이런 순환론에 입각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 순환론에 대한 글을 보면서 느끼던 게 확실히 동양인들의 역사관과 서양인들의 역사관은 지향점이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저도 짧은 머리로 역사책을 주섬거리면서 느끼는 것은 시대가 변하고 나라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이라는 본질적인 조건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는 '발전'의 양상을 띄더라도 결국 같은 형태를 띠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양의 발전론적 역사관보다는 동양의 순환론적 역사관이 더 와닿게 되더군요. 서두를 지나 본격적인 인물론이 시작되는데, 저는 정사에 치중한 인물론을 보게 될까 기대했지만 책의 내용은 대개 연의에 치중하고 정사기록이 참고로 약간 등장하더군요.
그렇게 이 책은 『삼국지연의』의 인물론이라고 봐야 할 듯 싶습니다. 인물론을 펼치면서 대개 조조와 유비는 함께 가게 되는데, 이는 두 사람의 성격에서부터 생김새까지가 -소설적 구성이겠지만- 거의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하지만 읽다 보면 두 사람의 공통점이 약간씩 보이는데 조조나 유비나 상당한 철면피를 깔다시피 한 뻔뻔스러움을 가졌고 그런 점이 그 난세를 살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겁니다. 다만 결정이 확고한 조조에 비하면 유비가 조금 우유부단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있지요. 조조의 인물론은 조조는 결코 선하지도 않고, 선비다운 고매함도 없지만 영웅의 타이틀을 확보했다고 결론이 나는데요.
책에서 마키아벨리가 약간씩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정치적인 입장에서 조조와 유비의 철면피성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이 책 1권의 상당수는 제갈공명의 인격과 능력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면 저자는 선비정신을 더 드높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삼국지연의』에서 거의 신급으로 과장되어 있다고 하지만 제가 주워들은 정사 속의 제갈공명은 그 인격이 훌륭하여 연의가 지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솔선수범과 엄격함을 갖춘 훌륭한 정치가이지 검소하고 고매한 선비로써의 제갈공명이요. 이런 사람이 오래도록 존경받고 신인[神人]의 대접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듯.
다만 아쉬운 것은 연의의 기록에 치중하다 보니 정사와 연의가 얼마나 유사하고 얼마나 차이를 보이는지는 잘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 점은 주유론에 가서도 보이는 아쉬움입니다. 주유가 정말 공명을 경계했는지 열폭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으니까요. 다만 이 책에서 공명의 그림자에 가려 빛을 못 본 방통과 노숙에 대해 고찰한 것은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의의 인물들 중 조조, 유비와 같은 경우는 그 단점을 지적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좋은 평에 도달한 것과는 달리 관우에 대해서는 평이 좀 차갑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는데요. 관우가 현재 신으로 모셔지곤 있으나 실제 역사에서는 장점이 있는 만큼 단점도 있고 연의도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이 책에서 약간 반박하고 싶은 부분은 관우가 하비성 전투에서 조조에게 항복한 부분과 관우가 왜 사람들에게 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이 약간 부족해 보인다는 점 때문입니다.
하비성 전투에서 관우가 조조에게 일시적으로 항복한 것에 대해 저자는 매섭게 비판하고 있는데 이 전투에서 관우가 항복한 이유는 의를 몰라서가 아니라 형수들이 인질로 잡혀 있어서였습니다. 만약 저자의 말대로 관우가 홀로 도망쳤거나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그들의 안위는 판단할 수 없었을 상황이었지요. 관우는 본디 '협'을 중시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의지할 데 없는 형수들을 모른 체할 사람이 아니었고 애초 도원결의의 시작도 그 '협'에 치중한 경향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형수들을 지켜내지 못하는 책임을 얘기한 장료의 설득은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었다고 봅니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그때의 이야기가 연의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소재를 건네준 것은 확실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관우신앙, 즉 관제 내지 관왕신앙이 동아시아 전반에 널리 퍼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 단순 충의의 모습만으로는 설득이 부족해 보입니다. 확실히 관우의 신앙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충신으로서의 이미지가 크긴 합니다만 저는 관우의 출신에도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어요. 『본삼국지』의 부록이나 이마이즈미 준노스케의 서적 『관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관우는 일반 백성들과 다르지 않은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즉, 관우는 가장 미천한 자리에서 자기 힘으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고 그러면서 '협'에 가까운 인생을 살다 간 사람입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영웅은 비범한 출생을 가지고 태어납니다만 관우는 후대에 사람을 도와줘서 벌 받은 용의 화신이라는 이야기만 덧붙여졌을 뿐 내세울 게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관우의 신앙은 역사 속의 지배자들이 민중을 다스리기 위해 포교정책을 크게 편 탓도 있었지만 민중들도 그것을 적극 받아들인 이유는 관우의 이런 출신에 사람들이 동질감을 느끼고 신분제 사회에서 어쩌면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던가 싶네요.
『삼국지 속의 삼국지』 2권의 내용을 주제별로 크게 분류해 보면 미인들 이야기, 유비의 쪼다성, 뛰어난 장수들, 대단한 모사들, 그리고 사마의와 『삼국지』 정통성 일곱 가지 이야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삼국지』 자체는 전쟁 이야기, 거의 남성에 치중된 이야기지만 가끔 눈에 띄는 여성들이 종종 등장하기는 하는데, 특히 미인들 중에 눈에 띄는 여자가 있는 법이죠. 대표적인 예가 초선인데 초선은 동탁과 여포를 갈라놓기 위해 연환계에 몸을 던졌으니 일종의 여성영웅인 셈이기도 하지만 후반 여포한테 간 모습이 그래서 그런가요? 이 책에서 초선에 대한 해석은 좀 지나치게 순정적인 여인으로 나오는 것 같더군요.
또 다른 미인들인 교씨 자매들은 이름 정도만 언급될 뿐이고 그 외에 조조랑 놀아난 과부 추씨, 원소 며느리였다가 조비 아내가 되는 진씨, 조운한테 차이는 번씨는 그 미모에 비하면 그 인생이나 역할이 변변찮은 느낌입니다. 반면 손권의 아우 손익의 처 서씨는 미모만이 아니라 지혜와 강단까지 갖춘 여인이니... 그런데 『삼국지』에서 미인으로 등장하는 여인들의 인생행로를 보면 다 순탄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결론이... 결국 미인박명이려나요? 근데 『삼국지』 미인론에 들어가기까지 유명한 중국고사의 미인들은 다 총출동합니다. 서시에서부터 우미인, 왕소군, 양귀비. 어느 여인들은 나라까지 기울게 한 데 비해 어떤 여인들은 나름 강단진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하니 미인이라 박복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성격 차이도 있는 듯합니다.
미인론을 지나 유비의 쪼다스러움을 해석한 부분에 들어서면 보통 『삼국지연의』를 읽으면서 유비에게 느끼는 답답함이 다시금 살아나는데요. 하지만 『고우영 삼국지』의 유비의 해석과 비슷한 면도 느껴지는 게 유비가 단순 멍청이에 불과했다면 절대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는 거죠. 『고우영 삼국지』의 유비는 바보처럼 능청을 떨어도 그 행동이 치밀하며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를 가진 사람인데 즉 유비는 쪼다스러움으로 자신의 영웅성을 가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민심을 끌어들이는 능력, 어떻게 해야 백성들의 눈길을 끌고 그들의 마음을 사는 지만은 확실하게 알던 건 아니었나 모르겠어요. 근데 웃긴 것은 유비의 아들 아두가 유비의 쪼다성만 물려받고 영웅성은 물려받지 못했다는 말이 꽤 그럴싸하다는 거죠.
장수론에 들어서면 『삼국지』의 유명한 장수들이 다 등장하는데 여포, 전위, 허저, 장비, 마초, 황충, 조운, 하후돈, 장료, 서황, 방덕 이 인물들이 그 가진 능력과 『삼국지연의』 내의 업적에 치중해서 설명이 되어 있다면 후반에 등장하는 조무, 황개, 주태, 감녕, 태사자는 충성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마지막에 등장하는 위연의 해석에선 위연의 반골을 심화시켜 갈등의 불씨를 뿌린 책임은 공명에게도 없지 않다는 새로운 해석을 보게 되어서 재밌었습니다.
장수론을 지나면 바로 모사론이 등장하는데, 『삼국지연의』에선 역시 모사들이 무궁한 활약을 함에 따라 저자도 못지않게 내용을 추려내는 데 고민을 했을 듯... 전풍, 순욱, 가후, 화흠이 등장하는데 전자인 전풍과 순욱에는 동정적이고 우호적인 데 반해 후자인 가후와 화흠은 부정적이더군요. 실제로 연의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연의의 배경이 난세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현실이 그런지 모르지만 오히려 현실주의적/기회주의적인 가후가 오래 안정된 삶을 산데 비해 전풍과 순욱과 같은 모사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저자가 이런 생각을 할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근데 화흠은 연의와 정사가 좀 다른 면모를 보인다고 하니 딱히 어떻다고 말하긴 힘드네요.
사마의론은 사마의가 어떻게 진나라의 초석을 닦을 수 있었는지 그 능력과 인품에 대해서 쓴 글인데, 사마의는 엘리트 가문의 수재이기도 했지만 읽다 보면 묘하게 유비하고도 겹치는 구석을 느꼈습니다. 출신이야 크게 다르다지만 유비가 굴욕적인 상황을 감내하면서도 천시를 기다리는 인물이라면 사마의 역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는 그런 타입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 다만 전략과 지혜 면에서 공명과 막상막하였을 정도의 머리를 갖춘 데다가 못난 아들을 둔 유비완 다르게 두 아들이 다 대단했다는 점이 차이가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 정통론은 학문적인 이야기, 역사서들을 둘러싼 이야기라 이쪽에 상당히 문외한인 저로써는 읽을 때 애먹었던 부분입니다. 어렴풋하게 이해하는 것은 위촉오 중 대개 위와 촉 둘 중 하나를 정통으로 삼거나 삼지 않거나 하는데 이는 당시 역사서가 기록되던 정황과 맞물려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정통 사상은 중국 역사를 관통한 사상이긴 하나 많이 부족한 점이 많은 이론이라는 것. 그리고 결론적으로 『삼국지』는 사람들의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소설이라는 점이죠.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고 부록으로 『삼국지연의』 속의 정치와 전략에 대한 간략한 설명, 공명의 출사표와 후출사표의 해석본, 『삼국지』 연표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또 이 부분에서 『삼국지연의』 내 다섯 전쟁 -관도대전/적벽대전/맥성전투/이릉대전/오장원전투-이 이기고 진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느꼈던 것은 『삼국지연의』를 관통하는 사상 중의 하나는 바로 운명론[천명]에 가깝다는 것. 유비, 조조, 손권 세 사람 다 삼국의 틀을 정립할 운명으로 태어났음을 암시하는 것과 끊임없이 연의 상에서 '시기'를 강조한 것도 후반에 삼국이 멸망하고 천하가 통일되는 것도 역사가 그렇기도 하지만 결국 운명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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