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2권의 시작은 재미없는 당태종의 저승행 편입니다. 뭐랄까, 중국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하겠지만 이 앞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당태종 찬양 일변도라서 - 역사적으로 위대한 황제라는 것은 알아도 어디까지나 중국황제라 - 끌리는 것도 없고 내용도 지지부진하고 저승시왕과 저승의 구조 이야기는 오히려 현재의 웹툰 『신과 함께』가 더 재밌게 묘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 웃긴 것은 저승의 시왕들마저 당태종을 황제라고 꽤나 대우한다는 건데... 뭐랄까요, 저승에서는 인간들이 평등하다는 게 보통 전제로 깔리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명부 담당이라고 해도 신에 가까운 인간들이 이승 황제에게 굽신거리는 것도 그렇고, 그야말로 닥치고 당태종 찬양하라는 의도인 거 같아 거북할 지경이었습니다. 재미도 없는 부분에서 찬양질이라고 해야 하나 얘네들이 이러니까 원숭이 정령인 손오공이 저승에서 깽판 놓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후에 찾아본 2010 드라마 『新 서유기』에선 아예 이 부분이 생략된 채 당태종의 명을 받아 현장이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던데요. 암만 자기들의 황제라고 해도 중국인들도 분명 이 부분은 재미없던 게 분명해요.
다만 여기서 특이점은 자살에 대한 옛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약간이나마 보인다는 겁니다. 저승에서 무사히 돌아온 답례로 저승에 없는 채소인 호박을 보내주겠다고 당태종이 약속하고 그것을 보내기 위한 자원한 인간이 바로 유전이란 양반인데요. 이 양반은 자기 부인이 스님에게 금비녀를 시주한 것을 가지고 부덕하다고 타박하자 부인이 분해서 홧김에 자살을 해버리고 그 때문에 자신도 후회하며 자살하여 부인을 쫓아갈 겸 황제의 명을 받아들입니다. 요새는 자살에 대한 관념이 바뀌어서인지 자살은 죄악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는데 이 부분에서 자살하는 것에 대해선 단순 죽음-혹은 의도치 않은 죽음 정도로 쓰여있어서 놀랐습니다. 저승행을 완수한 유전은 부인과 함께 돌아오는데 부인의 시신은 이미 없어졌으므로 명이 다한 당태종의 누이의 몸에 저승사자가 대신 혼을 집어넣고 부인은 공주로 환생(?)합니다. 깨어난 부인은 당태종이 자신을 누이라고 부르자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면서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한참을 난리 치는데 남편이 타박했다고 분풀이로 자살해버리거나 자기 나라 황제에게 성질을 부리는 걸 보자면 평소 성깔이 장난 아닌 여자였을 거란 생각도. 덕택에 유전이란 양반은 부인과도 재회하고 [몸은 달라졌지만] 부마로도 승격한 셈이니 횡재한 셈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중으로 변신한 관음보살과 목차행자가 불법을 구하는 당태종에게 금란가사와 구환석장을 건내줍니다. 원래 여래에게 받은 보물이 금란가사와 구환석장, 손오공 머리에 묶어둔 금고아를 비롯한 쇠테 여러 종류 이렇게 세 가지인데 앞의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이 쓰기 위해 남겨둔 거였죠. 후에 흑풍산 곰요괴와 홍해아를 제압할 때 쓰던 테들이 바로 이것. 관음보살은 전생에 금선자였던 현장에게 대승불교의 진경이 서천에 있다는 이야기를 한 뒤 사라지고 현장은 당태종과 형제의 의를 맺은 뒤 길을 떠납니다. 그 와중에 요괴에게 시종들이 잡아먹히고 태백금성이나 진산태보 유백흠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이야기가 이어지지요. 그리고 손오공을 오행산에서 풀어준 뒤 티격태격거리며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는데요.
관음선원이란 절의 승려들이 작당하고 금란가사를 도둑질하는 에피소드에서 손오공이 주지의 나이를 듣고 코웃음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번역본의 차이가 있어 약간 이미지가 다르게 와닿는 부분도 있는데 이 부분이 그렇습니다. 솔출판사 버전에서 이 부분의 손오공은 주지승이 자신의 나이를 묻자 말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좀 새침한 아이처럼 보였다면 여기 문학과 지성사판에선 먹을 만큼 먹었다고 대답하여 별생각 없이 평소에 인간을 얕잡아보는 듯한 손오공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내용 자체는 큰 차이가 없는 부분인데 왠지 이미지가 달라져서 재미나다는 생각도. 참고로 번역이 약간 달라진 부분을 하나 더 꼽자면 고로장 일가가 저팔계를 쫓아낼 궁리를 하며 하인을 시켜 도사를 찾을 때 솔출판사 버전에서는 그 하인을 아이라고 묘사한 반면 여기선 젊은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로장에서 손오공이 하인과 투닥거리는 장면은 솔출판사 버전이 좀 더 귀여운(?) 데가 있어요.
『서유기』의 특히 재미난 점은 여과없이 드러나는 손오공의 제멋대로인 성격인데 긴고아테가 머리에 씌워지자 관음보살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고는 남해 보타산에 쳐들어가서 관음보살을 두들겨 패주겠다고 소리치거나 - 물론 삼장이 관음보살이 긴고아주를 가르쳐준 거라 가만있겠느냐고 대답합니다 - 용마와 처음 맞닥뜨렸을 때도 관음보살을 찾아가 긴고아주 같은 것으로 자신을 괴롭히면서 몹쓸 용마는 왜 내버려 두냐며 화를 내거나 흑풍산 정령 흑대왕이 금란가사를 훔쳐간 것에도 관음선원이라고 자기 이름을 딴 절 옆에 저런 요괴가 살게 내버려 둔 관음보살 탓이라며 따지는 등... 보면 다 관음보살한테만 생떼를 쓰고 있군요. 관음보살의 도움 없이 알아서 스스로 항복한 것은 저팔계인데 저팔계는 손오공과 싸우다 도망쳤다가 손오공이 당나라 스님을 스승으로 모신다는 말에 바로 항복하고 자신을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러니까 손오공이 처음부터 삼장을 모신다고 했으면 용마나 사오정은 알아서 항복했을 텐데 손오공 성격이 문제란 말. 하지만 그랬으면 일이 너무 재미없게 끝나니 일부러 스토리를 꼬는 셈.
그리고 소설을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거지만, 손오공과 두 사제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같은데 저 짤방의 출처는 불명이지만 왠지 저런 반응하고 비슷하다고 할까요? 오행산에서 풀려난 손오공이 삼장을 모시고 양계산 너머 달단족[타타르] 경계 부근으로 넘어가면서 머물게 된 민가의 주인이 손오공을 보고 놀라는 것도 그렇고 황풍령 근처 민가에서 머물면서 만난 사람들의 반응도 한결같습니다. 삼장의 잘생긴 모습을 보고 안심하거나 반가워하다가 제자들이 따라오면 기겁하며 혼절하거나 도망가는 등의 반응이 10권 내내 똑같이 나옵니다. 후반에 조금 더 대담한 사람들은 겁을 내면서도 신기하다고 구경하는 일도 좀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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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출판사판 『서유기』가 구어체를 살려 번역했다면 이 문학과 지성사판 『서유기』는 현대소설처럼 "~한다, ~했다"라는 문체로 끝나기 때문에 처음 읽을 때 낯설어하지 않고 몰입이 빠른 점이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삽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많이 없다는 점이랄까요. 또 다른 차이점이라면 솔출판사 『서유기』가 내용의 주석을 달 때 한 단원의 끝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주석을 몽땅 달아놓는다면 문학과 지성사판 『서유기』는 그 페이지 아래에 주석을 달아놓습니다. 전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주석이 달린 책을 읽을 때 어느 쪽을 선호하느냐에 차이도 있을 거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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